[2016년 8월 칼럼] 예비노동자를 실업상태에서 구출해야 한다: 예비노동자에게 필요한 어떤 균형
예비노동자를 실업상태에서 구출해야 한다
: 예비노동자에게 필요한 어떤 균형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학전공 박사과정
소준철
이 시대, 예비노동자란 노동자도 실업자도 아닌 미묘한 존재다. 예를 들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A라는 내 친구와 마땅한 ‘타이틀’을 획득하지도 못 하고 정기적인 수입은 없지만 끊임없이 일을 하는 B라는 친구가 있다. 이 둘은 노동자인 듯 노동자가 아닌 노동자 같고, 실업자인 듯 실업자가 아닌 실업자같은 괴이한 상태다. 어쨌거나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발명품인 ‘예비노동자’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개진하겠다. 예비노동자는 엄밀히 노동자가 아니니,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얻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꼽으면 실업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아닐까?
우선은 이 애매한 ‘예비노동자’가 독일의 한 글쟁이가 말하는 ‘산업예비군’과 관계가 있지는 않나 살펴보겠다. 예비군은 ‘예비병들로 구성된 군대’인데 비해, 산업예비군이란 자본주의 산업에서 쓸모가 없어져 직업을 잃거나 마땅히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무리를 말한다. 공장에 새 기계가 들어오자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기술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기계에 보조를 맞추며 일한다. 위기가 발생하면, 사람들이 기계보다 생산능력이 떨어지니 당연 실업자가 되고 더 이상 쓸모없는 신세가 된다. 간혹 취업을 했다하더라도 기계를 보수하거나 기계가 미처 할 수 없는 일을 하는데, (이전 시대의 농사꾼이나 어부와 달리) 기계가 고장날 때나 비상수단으로 여겨지는 산업예비군의 상태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은 완전 실업자이거나 반실업자이기도 하며, 피구호자(被救護者)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랑스의 한 글쟁이가 적은 “산업예비군”의 처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저 실업자들과 애써서 취업을 준비하는 우리네 ‘예비노동자’가 뭐가 다른지 아직 와닿지 않을테니 말이다. 예비노동자들은 저때의 실업자들과 달리 정규교육과정을 거쳤고, 스펙을 쌓거나 다양한 경험을 한 신인류지 않나. 예비노동자는 우악스런 공장실업자들이 아니고, 다양한 산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은 개인이 잘나서가 아니다. 예비노동자와 국가라는 권력을 함께 놓고 본다면, ‘예비노동자’는 이 시대의 ‘산업예비군’과 그 격간이 의외로 짧다.
공장과 기계의 등장과 발전 이전을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의 땅이나 소작하는 땅에서 농사일을 하고 여기에서 나온 농작물로 알아서 먹고 살았다. 군주는 농사꾼들이 알아서 살게 내버려 두면 되었고, 자신의 의지를 거역할 때 칼을 휘두르며 죽지 않으려면 복종하라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군주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실업자가 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18세기를 지나면서 대규모 공장이 늘어나고 법적 인격체인 회사가 생겨났다. 많은 젊은이들은 땅을 떠나 자본가에게 고용되었다. 이때부터 도시와 시장에 실업자가 드글대기 시작했다. 군주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실업자들을 상대로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는 위협으로 상황을 전환할 수는 없었다.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기획이 필요했다. 먹고 살기 힘든 도시의 실업자들이 죽지 않고, 살게 하며 권력의 위치를 유지할 필요가 생겼다. 산업과 시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 필요가 생겼고, 자본주의에 합당한 노동력을 만들려는 기획을 시도했다. 그래서 감옥, 병원, 구빈원, 학교, 군대, 공장과 같은 장치가 고안됐다. 학교란 시간표를 몸에 익히고, 노동에 필요한 교과목을 정해 공부하게 해서 시장의 노동규율을 배우고 익혀 내재화하는 장치였다. 이렇게 국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실업자를 살려냈다. 즉, 교육받은 예비노동자란 근대국가의 산물이다. 그러나 완전히 실업상태를 없애지도 않는다. 실업자가 없다면, 임금이 낮은 일자리로 진입할 사람이 없어진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통계적으로 ‘적절한’ 실업자 비율을 통해, 산업을 유지한다. 그러나 국가가 사회를 파악하는 방식이 통계를 통해 가시성을 높이는 방식인 한, 사람 개개인의 버거운 처지를 이해할 수는 없는 정치상의 문제도 발생한다. 실업자는 임금이 낮은 분야로 들어가 현재의 처지를 근근 버틴다. 혹은 불안정한 상태를 감내하며 살아간다.
정치가 바라보지 않는 일상을 토로하는 일은 필요하다. 우선 예비노동자는 (노동자되기를 준비하는) 실업상태에 처한 사람들로 보고 분류한다면, 다음의 셋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생애주기 상 청년기에 노동시장에 진입하고자 하는 ‘취업준비생’, 출산과 육아로 단절된 노동경력을 이어보려는 ‘경력단절여성’, 은퇴하였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시장의 언저리에 발을 걸쳐야 하는 ‘은퇴자’로 말이다.
우선, 교육이 끝나고 미처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특수하게 ‘취업준비생’이나 ‘취준생’이라고도 불린다. 교육수준을 기준으로 보면, 누구나가 하게끔 정해진 12년간의 교육과정을 근근 해치우고 난 사람들이 많다. 대학이나 대학교에서 (심지어 대학원에서) 몇 년의 시간을 해치운 사람들도 있다. 물론 졸업을 하지 않고 퇴교를 결정한 사람도 포함해야 한다. 교육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일반교육과 고등교육자의 길이 달라지는 일이 왕왕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법연수원 졸업자가 9급 공무원 시험을 친다든지, 4년제 대학교 졸업자가 환경미화원이 된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옥신각신했다. 교육과정은 한 사람이 노동의 종류를 결정하는데 기회비용 조(條)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참 노동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있다. 요사이 주목받는 대상은 흔히 경단녀 혹은 경력단절여성으로 불리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한참 노동하다 ‘결혼’이나 ‘출산’으로 퇴직이나 해고당하였다. 아직도 여러 회사에서 ‘여성’의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휴직과 그 부담 때문에 구인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회사가 더 많은 상황이다. 법적으로 보장되는 사안이지만, 휴직대체자를 부담으로 이해하는 회사와 육아를 여성에게 전담하는 한국사회의 특징이 만들어낸 특수한 대상이다.
또 다른 경우도 존재한다. 바로 노동자 생활의 끝이라 여겨진 은퇴자들이다. 이른 경우에는 40대, 아무리 늦어도 60대 중반의 나이에 회사의 사정이나 자신의 나이에 따라서 은퇴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진짜 처지와 상관없이 노동하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산업을 바꾸거나 직업을 새로 가지면서 노동을 지속하지만, 고령인 사람들은 노쇠한 상태로 치부되어 의지와 상관없이 노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마땅한 자본이 없는 경우에, 노쇠한 몸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70세를 전후한 시기까지나 가능하다. 지혜와 지식이라는 정신적 노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통계나 경험으로나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노동력을 수용하는 경우는 극히 적다. 노동자로 살다 은퇴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값싼 벌이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예비노동자들은 노동자가 되기 위해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특히 무엇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지에 대해 상상해봤다. 실질적으로 ‘채용’과정은 사람들이 ‘빽’과 ‘행운’이 최종 결정요인이 아니겠냐며 상상하게 만든다. 또 변화하는 사회에서 ‘기술’은 예비노동자와 노동자 모두에게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셋째, 예비노동자의 생계 문제다.
첫째, 거의 일원화된 채용 ‘심사’를 경험한다. 노동자되기의 노력은 항상 마땅한 ‘서류’를 적어 회사에 보내는걸로 시작한다. 복붙(복사 후 붙여넣기의 줄임말)하지 않겠다 마음 먹지만, 딱히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정한 질문들이 이루어진다. 취업원서를 작성해본 사람이라면 이 질문들에 대해서 기본적인 답의 틀이 있다. “나는 긍정적인 어떤 경험을 통하여 자기계발하였고, 부정적인 어떤 경험을 극복하며 발전하였다”는 류의 서사를 구사한다. 자기계발과 위기극복의 서사들은 요사이 청년 자소설(자기소개서를 소설로 썼다며, 자기소개서-소설을 줄여 자소설이라 말한다)을 지배한다. 내용이 비슷하니 글로는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 이때 어떤 회사는 학력이나 영어시험 성적에서 높은 사람을 데려가고, 또 어떤 회사는 경험의 다양한 양을 가진 사람을 데려간다. 서류 통과 미션을 지나면, 어느 방향이거나 면접 미션이 찾아온다. (대기업은 단체합숙을 통한 심사를 한다고도 하지만) 면접미션은 탁월한 외모나 감정의 표현이나 대화 기술이 좌우한다. ‘특이한’ 회사를 빼놓고는 이 방식을 거치며 ‘노동자’가 된다. 특이한 점은 서류와 면접에서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여러 곳에서 합격통보를 받고, 마땅한 테크닉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물을 먹는다. 이런 상황이라 예비노동자라 불릴만한 사람들은 (채용인원마저 줄어드는) 기업보다, 어릴 적 경험한대로 시험만으로 평가하는 공무원채용시험으로 달려드는 건 아닐까?
둘째, 끊임없이 변하는 기술을 습득하거나 습득을 포기해야 한다. 젊으면 젊은대로 나이들면 나이들은대로, 기술을 얼마나 이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예비노동자가 할 수 있는 노동의 범위가 정해진다. 앞으로는 (막상 듣고 무언지 와닿지도 않는) 코딩을 일반교육에 포함시킨다고 한다. 프로그램 코딩을 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는 대장장이와 손님과 같다. 필요한 장구를 직접 만들고 다듬질까지 할 줄 아는 사람과 대장장이가 없으면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손님의 처지다. 그러나 모든 기술을 습득할 수는 없기에 포기도 분명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보면 기술은 습득과 포기의 대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기술에 적응하는 건, 몸에 익은 습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자녀가 부모세대와 일을 하는 모습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관리직급의 사람들은 “이 나이에 어떻게 새로 배우냐”며 새로운 습관을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렇게 기술의 습득 과정에서 윗세대는 아랫세대들에게 항상 두려운 표본이 되며 동시에 자기계발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나이든 상사들에 대해 “젊은 사람들의 자기계발을 운운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정체하냐”는 혼잣말을 수차례 반복한다지만, 코딩하는 일반인의 사회가 온다면 우리 또래 역시 지금 상사들을 답습하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예비노동자들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고정적으로나 유동적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특히나 예비노동자들은 서비스업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많다. 최저시급의 언저리를 오가는 돈과 고정된 계약기간이 없는 서비스업은 당장 삶을 위해(danger)하는 궁핍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1주일 40시간 이하로 노동하는게 보통이라서 재량껏 준비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값이 싼 시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게 ‘예비노동자’로서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예비노동자는 반실업상태를 버텨내야 한다. (돈을 벌지만) 실업과 취업 사이에서 오가는 처지다. 실업자가 아니라 일을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해야하는 끼인 상태다. 예비노동자에게는 ‘노동자가 될 준비’와 ‘생계의 유지’와 ‘개인의 생활’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 ‘노동자가 될 준비’에 대한 교정 역시 필요하다. 시장에서 필요한 일을 위해 기획된 예비노동자의 삶은, 한국사회에서 소모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능력이 아니라 자격을 증명하는데 급급한 상황에 변화가 필요하다. 게다가 (갑작스런) 시장과 국가 정책의 변화는 끊임없이 ‘예비노동자’를 실업상태에서 머물도록 만들기 쉽다. 예비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생계의 유지”가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