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휴가를 회사에 알리지 말라” 직장인 눈치 싸움
대기업 2년차 직장인 황모(26·여)씨는 지난달 ‘동남아 여행을 간다’며 여름휴가를 썼다. 그런데 해외여행 계획은 없었다. 사실 ‘해외여행 코스프레(만화나 영화, 게임의 등장인물과 똑같이 분장하고 따라서 행동하는 것)’였다.
황씨는 집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할일 없이 집에 있는 것처럼 비춰지면 ‘회사의 연락’을 공식적으로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휴가 이틀 만에 회사 선배로부터 모바일메신저로 메시지가 왔다. 업무 관련 서류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휴가를 떠나면 남긴 인수인계 파일에 다 있는 내용이었다. 황씨는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메시지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비슷한 메시지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전화도 한 차례 걸려왔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회사의 연락’이 네 차례나 이어졌지만 황씨는 모른 척 했다.
대신 휴가 마지막 날 회사 선배들에게 ‘동남아시아에 있었는데 와이파이 연결이 잘 안 돼 확인을 못했다’는 단체 메시지를 돌렸다. 황씨는 “회사에선 휴가 중에 업무 연락이 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며 “오죽했으면 해외에 나간다고 했겠냐. 실제로 연락이 와서 더 놀랐다”고 말했다.
직장인들은 자신의 휴가를 회사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 회사의 연락을 피하기 위해서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모(29)씨는 지난해 어설프게 ‘해외여행 코스프레’를 했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지만 휴가 복귀 뒤에 여행 일정과 소감을 꼬치꼬치 캐묻는 선배의 질문에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씨는 이번 휴가에 확실한 ‘알리바이’를 준비했다. 휴가 기간에 모바일메신저의 프로필 사진을 일본의 거리 풍경으로 바꿨다. 예전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이다. 휴가 복귀 이후 여행 일정을 자연스럽게 얘기하기 위해 가봤던 도시 이름을 되내기도 했다.
여기에다 인터넷으로 현지 날씨도 검색했다. 휴가 마지막 날에는 남대문시장에 가서 팀원들에게 선물로 줄 일본 수입과자까지 준비했다. 이씨는 “심지어 대형마트에서 동남아산 건망고를 사가는 친구도 있다”고 전했다.
왜 번거로움을 자처하며 ‘해외여행 코스프레’를 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후진적인 직장문화, 근로환경을 지목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1일 “며칠 되지 않는 휴가라도 온전히 보내려는 일종의 ‘생존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며칠 안 되는 휴가라도 ‘회사의 연락’을 끊고 푹 쉬고 싶다는 심리인 것이다.
우리나라 근로자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4년 기준으로 2057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3번째로 길다. 반면 제대로 쉬지는 못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4년 펴낸 국민여가활동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평균 휴가일수는 6일에 불과했다. 취업포탈 잡코리아가 지난 3월 직장인 533명을 조사했더니 10명 가운데 6명은 연차를 다 쓰지 못했다고 답했다.
한편 일부러 해외여행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있다. 미혼의 직장인이 이성친구와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어서다. 직장인 유모(29·여)씨는 “누구와 어디에 갔는지 내 휴가에 대해서 회사에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생활균형재단의 김영주 연구원은 “누구와 어디에 갔는지 묻는 건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질문’이 될 수 있다. 휴가 기간에는 업무 연락을 자제하고 개인의 일정을 자세히 묻지 않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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