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출산 후에도 맞벌이를 하는 A(여·39) 씨. 바쁜 워킹맘이지만 그녀는 평일에도 9살, 6살 자녀와 여가를 즐기고 저녁에는 직접 요리도 만들어준다. 주변에서는 A씨를 ‘슈퍼우먼’이라고 부르지만 비결은 유연근무제이다. A씨의 회사는 지난해 2월부터 하루 6시간 근무하는 단축근무제와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탄력근무제를 도입했다. A씨는 “일·육아·살림을 병행할 수 있고, 여가도 즐길 수 있어 삶의 질이 높아졌다”며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과 삶의 양립을 가능하게 하는 근무방식으로 유연근무제가 주목받고 있다. 유연근무제란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IT(정보기술) 등을 활용해 각자의 상황에 맞춰 일하는 것이다. 직원의 삶의 질을 높여야 생산성·창의성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기업들이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거나 검토하고 있다.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 출퇴근 시간을 늦추거나 당기는 시차출퇴근, 가까운 업무공간으로 출근하는 거점근무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유연근무제가 퍼지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기업이 적지 않다. 하나투어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직원이 즐거워야 고객에게 진정한 행복을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2011년 5월부터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이용자가 점차 늘어 올해 7월 말 현재 전체 임직원 2천357명 중 51.9%인 1천223명이 선택했다. 형태별로는 142명이 재택근무, 545명이 거점근무, 234명이 시차출퇴근, 302명이 스마트세일즈를 하고 있다. 스마트세일즈란 영업사원들이 집에서 거래처로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것이다.
하나투어 관계자는 “유연근무제 도입 당시 실적악화나 소속감 결여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면서 “하지만 막상 해보니 매출이 크게 늘고 직원들의 퇴사율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고 전했다. 유연근무제 도입 후 이 회사 매출은 2011년 2천264억 원, 2012년 2천592억 원, 2013년 2천976억 원, 2014년 3천154억 원, 2015년 3천600억 원으로 4년 만에 59% 증가했다. 반면 퇴사율은 2011년 9.3%, 2012년 9.0%, 2013년 6.4%, 2014년 6.9%, 2015년 5.8%로 같은 기간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KT도 2010년 8월부터 선택근무제·재량근무제·시차출근제를 시행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회사의 선택근무제는 직군에 상관없이 주 40시간 내에서 자유롭게 근무시간을 택하는 것이다. 단,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필수 근무시간은 지켜야 한다. 재량근무제를 택하면 근무시간을 100% 재량껏 정할 수 있어 일주일에 3~4일만 회사에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재량근무제는 연구·개발, IT 분석·설계 등 특정 부서에만 적용되고 있다. KT 관계자는 “직원들이 각자의 삶과 업무의 특성에 맞춰 일하도록 노력하고 있다”며 “유연근무제로 우수 직원이 장기간 근무하게 되면 회사에도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밖에도 삼성전자, 롯데그룹, 유한킴벌리 등 굴지의 대기업들을 비롯해 기업문화나 의사결정 과정이 비교적 자유로운 벤처·중소기업계에서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곳이 하나둘 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직장문화가 ‘보수적’인 금융권에서도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곳이 나왔다. 올해 7월 말 신한은행은 국내 은행 중 최초로 서울과 수도권에 3곳의 스마트워크센터를 개설했다. 기획·디자인·브랜드전략 등 은행 전산망이 필요하지 않은 부서의 직원들이 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데, 하루 8시간 근무에 맞춰 출근시간 조정도 가능하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스마트워크센터 근무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이 좋아 앞으로 더 많은 직군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가 올해 6월 유연근무제 도입 기업 150곳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92.8%가 “만족한다”고 평가했다. 구체적인 효과로 기업은 생산성 향상(92.0%, 이하 복수응답)과 이직률 감소(92.0%), 우수인재 확보(87.3%)를, 직원들은 일·가정의 양립(96.7%), 직무만족도 향상(96.0%) 등을 꼽았다.
그러나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말 5인 이상 사업체 1천 곳을 표본 조사한 결과 유연근무제 도입률은 22.0%에 불과했다.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서는 아직 많이 낮은 수준이다. 이 가운데 시차출퇴근제 하나만 봐도 미국은 81.0%, EU(유럽연합)는 66.0%인 데 비해 한국은 12.7%이다.
유연근무제 확산을 가로막는 요인으로는 부적합한 직무가 많다는 것과 대면(對面) 중심의 기업문화, 인건비 증가 부담 등이 꼽힌다. 올해 6월 대한상의가 유연근무제 도입을 검토 중인 150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예상되는 애로점으로, 대체인력 채용에 따른 인건비 부담 증가(24.7%), 기존 근로자의 업무 가중(23.3%), 인사관리의 어려움(22.7%) 등이 지목됐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유연근무제가 성공하려면 먼저 기업이 면대면 업무방식을 개선하고 공정한 인사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면서 “정부에서도 기업이 유연근무제를 도입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