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칼럼] 일-가정 양립에서 일-생활 균형으로
김영란(숙명여자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
1999년 어느 날 미국 작가 존 브록맨(John Brockman)은 21세기를 앞두고 인터넷을 통해 ‘지난 2000년간 사람이 만든 것 중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세계 석학 1백여 명이 잇따라 투고했다. 투고내용을 보면 다양한 발명품이 제시되었는데 다수가 피임약, 분유, 생리대, 여성해방, 전통적 가족구조의 해체 등을 꼽았다. 그 이유로는 이들 발명품들이 여성의 지위향상에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인류가 만든 발명품은 여성의 삶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21세기 초입에 선 지금 여성의 삶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다양한 발명품들로 인해 여성의 교육, 일, 직업, 결혼, 자녀양육 등에서 남성과 유사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여성 생애주기의 남성화를 들 수 있다.
한 사회에서 개인의 삶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사회구성원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인식되는 사회적시간표(social time table)에 따라 짜여 진다. 사회적 시간표에는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시기의 순서가 나타나고 이 시기를 언제 지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에 대한 규범이 존재한다. 특히 여성에게 어느 선까지 교육을 받고 언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일을 한다면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한 특정한 규범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자료를 기반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시간표를 보면 1980년대의 경우 평균 교육연수는 1985년 여성은 7.6년(남성 9.7년)이었고 1987년 평균초혼연령은 24.5세, 1985년 기대자녀수는 2.5명이었으며 실제출생률은 2.82명이었다. 실제경제활동참가율은 1985년 41.9%였다. 1987년의 이혼건수는 42,375건이었으며, 1985년도 여성가구주의 비율은 15.7% 이었다.
그런데 년대에 들어오면 여성의 사회적 시간표는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평균교육연수는 2000 . 2010년 여성은 10.9년(남성 12.4년)이었고 2013년 평균초혼연령은 29.6세(남성 32.2세), 2013년 출생률은 1.19명이었다. 실제경제활동참가율은 2014년 51.3%였다. 이 시기 2013년 이혼건수는 115,292건이었으며, 2011년 여성가구주의 비율은 25.9%이었다. 한 사회에서 통과의례인 일, 결혼, 자녀출산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여성의 사회적 시간표는 198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진입하면서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여성가구 주의 증가는 그동안 남성=생계유지자(breadwinner), 여성= 보살피는 자(caregiver) 라는 성역할에 대한 이분법적 구조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교육, 일, 취업, 결혼, 자녀출산 등에 대한 여성의 사회적 시간표는 남성과 유사하게 변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일, 복지, 가족에서 양면적인 위치에 있으며, 현재 여성의 위치는 분야 별로 불균등한 변화를 가져온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증가, 고학력여성의 증가, 전문직 참여 증가, 전통적인 남성직업에 여성들의 진출 등과 함께 젠더평등을 위한 정책마련 등 지위가 개선되고 있다.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임금이 높은 전문직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직업구조의 상층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발전은 빠르게 확대되는 저임금의 임시직, 파트타임직으로 일하는 여성들의 증가로 인해 상쇄되고 있다. 또한 여전히 지속되는 여성의 가사 및 육아역할 담당은 지금까지 여성들의 어머니 되기와 일하기에 있어 거의 해결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2014)과 고용노동부(2015)에 의하면 맞벌이가구 가사 및 육아시간은 남자 0.7시간, 여 3.3시간이며, 전체 육아휴직자(19,743명)중 남성휴직자(879명)는 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의 교육기간 확대와 경제활동 참여로 인해 생애과정에서 남성화되는 면을 보이는 반면 여전히 가정일은 남성의 참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여성이 담당하고 있어 오히려 일의 부담이 늘어나는 등 새로운 성별분업 현상을 보이고 있다. 즉 기존의 성별분업 형태인 ‘남성-직장, 여성-가정’에서 ‘남성-직장, 여성-직장 그리고 가정’으로의 전환됨에 따라 여성의 역할이 오히려 가중되는 상황에 있으며 여성의 취업과 관련하여 직장이나 가정이 거의 재편되지 않는 실정이다 보니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꺼리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국가차원에서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을 제정한 이후 2007년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로 바뀌는 등 여성의 고용 및 가정역할에 대한 지원을 모색하고 있다. 즉 육아휴직을 장려하기 위해 육아휴직장려금 제도를 도입하고 공무원에 한해 간호휴가제를 도입하고 있으며 현재 근로여성의 모성보호를 위해 60일간 유급출산휴가, 임신 중 경미한 근로로의 전환, 시간외 근로제한 등을 보장하고 있다. 이는 일-가정양립 지원체제지원을 위한 것으로 맞벌이 가족의 지속적인 증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그 강제성이 미약해서 실현을 보증하기 어려울 뿐 만 아니라 한국의 노동시장 특성상 대기업에 고용된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에게만 그 수혜가 돌아가는 혜택의 차등화를 낳고 있다. 실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비율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비용으로 인해 육아휴직은 여성고용을 기피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경력단절, 시간선택제일자리, 가족돌봄을 위한 직업중단은 여성에게 해당되는 용어로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국가는 저출산과 관련하여 다양한 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사회 위원회는 ‘일-가정 양립, 행복한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목표아래 여성의경력단절과 과도한 돌봄 책임을 완화할 수 있는 중요한 양성평등추진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출산율 제고, 경제활동 및 모든 시민의 조화로운 발전도모하며 임신, 출산, 양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반조치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일과 생활여건을 고려한 일-가정 양립 추진을 실천전략으로 하고 있다. 또한 고용노동부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 확산을 위해 작년 12월, 사용기간을 현재보다 2배 연장(최대 2년)하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며 2015년 7월부터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부여 시 사업주에게 지급하는 지원금도 월 10만원 인상(대기업 월 10만→20만원, 중소기업 월 20만→30만원)할 계획이다. 아울러 고운맘카드 정보를 연계해 임신근로자 및 사업장을 대상으로 맞춤형 안내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가정 양립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관계 부처 합동으로 ‘일가양득’ 캠페인도 추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가정양립(work-family balance)은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점이다. 즉 법과 제도에서 사용되는 일-가정양립의 주 대상은 여성으로 자신의 생활(life)이 아닌 가정(family)과의 양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2014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이슈페이퍼에 의하면 여성구직자의 희망근로형태는 2/3 가량은 전일제를, 1/3가량은 시간제를 선호하고 있다. 이들은 ‘일을 하는 것은 내게 삶의 보람과 활력’을 주며(92%), 또한 ‘일을 함으로써 식구들한테 더 인정받을 수 있다(80%)’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성에게 일은 삶(life)와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행해지는 일-가정 양립지원정책에서 남성은 명목상으로 존재하며 실제적으로는 여성을 가정과 연계하는 성별분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일과 생활의 균형(work-life balance)은 근로자 자신이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할 시간과 기회를 허락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일-생활균형은 일을 위해서 즐거움과 여가를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양립’은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과, 또는 둘 이상의 대상이 동시에 성립되는 것을 의미한다. ‘균형’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고른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일-가정양립은 일하는 여성이 가정역할도 동시에 잘 수행하도록 하는 것인 반면 일-생활균형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일은 삶의 일부로서 다른 부분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성(性)을 넘어서는 것이다. 최근 여성의 경력단절을 예방함에 있어 고용환경의 개선이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는 ‘남성 육아휴직이 여성의 경력단절과 일-가정 양립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는 고용노동부의 견해와 사뭇 다르다. 여기에는 단순히 남성의 가사 및 육아활동 참여가 아니라 법과 제도의 변화와 함께 문화적 관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일-생활균형은 고용환경 뿐 만 아니라 교육이나 가사영역을 비롯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존의 성별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법과 제도 그리고 성역할고정 관념은 탈성별분업(de-gendering)을 기반으로 한 일-생활균형으로 거대한 변환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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