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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16년 7월 칼럼] “놀이와 쉼 사이에서”

BY일생활균형재단

“놀이와 쉼 사이에서”

문화기획자 김유진

 

  1. 놀기도 지친다

몇 주 전, “어른들의 놀이 문화”라는 주제로 이 원고를 써주길 청탁받았었다. 노는 어른이 노는 아이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작년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덕인가. 놀이에 관심 갖게 된 이유는 내가 일하는 것보단 노는 게 좋아서도 있지만, 깊게는 아니라도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세상 돌아가는 꼴에 관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뉴스에서는 한국의 현재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출산률, 자살률, 근로시간에 관한 통계를 자주 인용하였다. 출산률은 인구절벽, 자살률은 우울증과 빈곤, 근로시간은 번아웃 증후군 등의 사회현상과 결합되어 언급되었고, 삶의 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과거보다 설득력 있게 들리는 시대가 되었다.

지역차가 좀 있겠지만 이러한 흐름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정치 슬로건이 한때 신드롬 수준이었고, 경제 성장과 개인의 성공을 통해 삶의 의미를 더 이상 찾기 어려운 저성장 시대의 도래를 대비해 사회시스템의 변혁이 진행 중이다.

국가에서 ‘국민 삶의 질 지표’를 개발하여 2014년에는 홈페이지를 열었다. 관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사회통합지표도 개발되었다. 문화예술 방면에서는 여가와 놀이문화의 부상으로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커뮤니티 아트 분야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변화의 결과가 아직 직접적이진 않다. 한국의 근로시간은 2014년 멕시코에 이어 2위, 2015년엔 3위로 20년 째 변함없이 최하위권이다.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350~420시간이 넘는 장시간 근로 실태는 주변 직장인들이 “바쁘다” 투덜거릴 때, 용건 없이 저녁 한 끼 먹을 약속 잡는 게 힘들 때 절절히 체감된다.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사람들과 만나는 이유도 일 때문이니 언제나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욕구불만에 가득 찼는데 놀지 못하면 인터넷 쇼핑이라도 좀 질러줘야 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과 생활의 균형을 말할 때 놀이라는 주제가 빠질 수 없는 노릇이다.

헌데, 주제를 받아들고는 어쩐지 이번엔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놀자는 말이 적절치 않은 느낌이었다. 왜일까. 놀이를 주목하는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다. 너는 놀이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되돌아온 답변에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는 요즘에 지치는 기분이라고 했다. 놀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는데 놀기에도 지친다는 것이다. 놀기는 노는데 쉬면서 놀고 싶다는 것이다.

무릎을 탁 쳤다. 얼마 전에 ‘멍때리기 대회’가 대히트를 쳐서 뉴스에까지 보도된 사건이 떠올랐다. 그렇다. 논다는 개념, 놀이를 대하는 감수성이 달라진 것이다.

 

  1. 풍요 속의 빈곤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내 또래가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노는” 자세를 멋있다고 말했었다. 일도 열심히, 놀이도 열심히, 내 삶도 열심히.

권위주의적이어서 후배나 부하 직원을 직장에 잡아두는 상사들도 많았지만, 또래들끼리도 뭉쳐 다니며 자발적이고 격정적으로 밤을 새는 일이 꽤 있었다. 대졸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창업하는 삶을 꿈꾸었고, 우리가 노력해 일군 회사를 하나의 이상적 공동체로 여겼던 것 같다. 함께 꿈꾸고, 일해서 돈을 벌고, 성공하고, 노년까지 좋은 친구이자 이웃으로 남을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낙관.

지금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이 많이 다르다. 과로는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지만, 생동감 있게 몰입해서 일하다 보니 어느새 내 일에만 집착하면서 가족과 친구도 잊는 형태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질질 끌려 다닌다는 느낌이다. 90년대에 그렇게 멋졌던, 자기 동기에서 출발해 멈추지 않고 일하는 워커홀릭 상사는 이제 어쩌면 재앙이다. 그런 상사를 모시는 직원 입장에서도 재앙이지만, 상사 본인에게도 재앙이다. 직원들은 꾸역꾸역 상사의 속도를 쫓아가느라 고역이고, 야심에 찬 상사는 좀 더 나은 목표를 향해 다른 이들을 끌고 밀고 가느라 고역이다.

이 같은 현상을 이미 지적한 책이 있다.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2012년 번역된 ‘피로사회’가 일종의 교양서로 상당한 파급력을 보여주었다. 독일에 거주 중인 저자 한병철은 과로 대신 피로라는 표현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이 이슈가 단지 국내용이 아니란 점을 알리면서 유명해졌다.

사실 책의 내용이 상당히 철학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이 사람들에게 회자된 이유는 에세이처럼 술술 읽히는 글쓰기 스타일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통찰력 때문일 것이다. 가장 동의할 만한 지점은 그가 비판하는 ‘과잉’의 세계에 있다.

일은 생산성의 세계에 속해있다.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은 생산성을 높인다는 뜻이다. 생산성이 높아져 우리 삶이 윤택해진다는 믿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일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본질적으로 보면, 일이란 내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고 목표를 잡고 노동을 투입하여 산출물이 나오고, 그 산출물로 내가 살아갈 터를 한 단계씩 지어나가는 것이다. 점차 풍요로워져 나와 주변인들이 심신 편안하게 번영하며 나눌 것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삶에서 노동이란 내 삶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공장화된 일터에서 느끼는 불안과 소외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고전적이고 널리 알려진 주제다. ‘피로사회’의 좀 다른 점은 노동 공간 대신 소비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일을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우리의 일반적 관념에 균열을 냈다는 것이다. 노동 현장에서의 생산성을 위한 생산성은 소비 공간에서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가?

이런 예를 들어보자. 대형마트에서 나는 가끔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을 보는 것처럼 현기증이 난다. 루이비통과 콜라보한 제품으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는 정신분열을 겪은 적 있는 작가이다. 그녀의 시그니쳐 메뉴는 땡땡이 무늬로 사방천지를 덮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유사한 패턴의 강박적인 반복을 통한 환각적 불안이다.

마트를 쿠사마 야요이에 비유한 것이 마트에서 예술성을 찾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수십 종의 늘어선 세탁세제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멍하고 불안하고 환각적이 된다. 어떤 세제를 선택해야 할지 궁지에 몰린다. 다들 저마다 자기가 좋은 제품이라고 나에게 속삭인다. 결국 나는 두 개를 한 개 가격으로 묶어 파는 할인 상품을 사게 된다. 이 과잉 속에서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는 게 나만은 아닐 것이다.

거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을 짓기 위해 우리는 노동한다. 거품 집과 노동은 돈으로 매개되어 있어 우리는 우리가 짓고 있는 거품 집을 직접 목격할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 노동의 정체를 알기도 어렵다. 끊임없이, 중단없이, 의미없이 이어지는 생산성의 향연. 이것이 우울한 피로감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것이 한병철의 주장이다.

 

  1. 떠돌이의 생존 방식

한병철의 책들이 연이어 출간될 때 그에 대한 찬사도 이어졌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자기 계발로 인해 피로에 빠진 현대인들은 불의에 분노하거나, 함께 대안을 모색하는 등 상황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을 보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견 이 책은 여러 종류의 신경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힐링’을 우선 처방해주는 것 같다. 지난 몇 년 간 ‘힐링’이 우리 사회의 굵직한 이슈였던 만큼 각 분야 전문가들은 ‘힐링’ 처방의 한계를 꾸준히 지적해 왔는데 한병철의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흘러넘치도록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서 생산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일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열심히’는 생산성의 영역에 있는 단어이다. 분노도, 정열 넘치는 놀이도 ‘열심히’의 영역에 있고, 상당한 에너지를 투입해 무언가 생산적인 현상을 만들어 내고 싶을 때 쓰는 단어이다. 생산성에 지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생산성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 기획인지 나는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한국의 노동이 처한 조건을 살펴보자. 근로시간이 주로 지적되지만 다른 노동 조건들도 만만치가 않다. 한국의 평균근속년수는 2014년 5.6년으로 OECD 국가 평균 9.4년에 한참 못 미친다. 경제활동참가율, 고용률, 실업률, 시간제근로자 비율 순위는 OECD 가입 후 순위가 오히려 떨어졌다. 특히, 시간제근로자 비율은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추세이긴 하지만 OECD 국가 평균이 1.2%인데 비해 한국은 4.2%로 2003년보다 3배 이상 늘어났다. 청년 시간제 근로자는 2003년 7.4%에서 2015년 15.5%로, 중고령층은 14.6%에서 33.5%로 증가했다.

장시간 근로는 고된 노동을 뜻하지만, 나머지 지표들은 근로 환경의 불안정성에 대한 것이다. 떠돌아다니며 일해야 하는 근로 환경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지치게 만든다. 매번 일터를 옮길 때마다 남들보다 나은 자신에게 일할 기회를 달라고 해야 하니 스펙과 평판 관리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고, 인간관계도 일시적인 상태로 머물게 된다. 새 직장에서는 에너지도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패기를 보여주는 것은 뉴비의 숙명이다.

단지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쓴다. 이것이 변화한 게임의 룰이다. 때문에,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쉬는 것이다. “그냥”이 중요하다.

 

  1. 놀이라는 스펙을 벗어나

이제 다시 놀이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어른들의 놀이문화라고 할 때, 어른 중에서도 여가 생활이 어려운 직장인들에게 나는 특히 관심이 많았다. 놀지 못하는 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생산성 과잉에 길들여진 어른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 같아서.

놀지 못하는 어른이 빈둥대는 아이들의 놀이를 참아주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때문에, 똑똑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놀이가 필요하다고 하면 놀이마저 스펙으로 만든다. 놀이는 어른이 되어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현명하고 생산적인 학습법으로만 인식된다. 이 학습법은 소비 공간에 끝없이 진열되고, 놀이를 구매하면 놀 공간과 친구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거꾸로 어떤 이들은 놀 공간과 친구들이 사라져 어쩔 수 없이 놀이 학습법을 구매한다.

어른들의 놀이문화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사진을 찍을 땐 더 나은 장비를 갖춰야 한다. 취미로 창작 생활을 할 때는 더 나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 더 나아가 요즘에는 경험도 스펙처럼 쌓고, 경험의 질의 비교 우위를 따진다. 이 모든 활동이 목표 중심적이며 생산의 논리를 따른다. 우리는 결국, 놀이를 소유하게 된다.

사람이 성장하려는 욕망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세포 성장이 과잉이 되면 암이 되기 마련이다. 유기체의 성장이란 생명의 리듬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때때로 “그냥”이 필요하고, 요즘 같아선 “그냥”이 아주 많이 필요해 보인다. 놀기와 쉬기는 어떤 측면에선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어떤 측면에선 같은 것이다. 사람은 하찮은 돌도 꾸며서 들고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애착을 품게 된다. 이렇게 아무런 목표도 없이 일어나는 세상과의 다양한 상호작용이 놀이이면서 곧 쉼이다. 그리고 이렇듯 쓸모도 목표도 추구하지 않는 놀이와 쉼 사이의 틈새는 소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고기사 :

서울신문, “새벽 퇴근해 아침에 또 출근… “한국인들 일 너무 많이 해요”“, 2016-7-15

서울신문, “OECD 가입 20년… 고용률 등 노동지표 하위권”, 2016-7-10

이데일리, “韓OECD 가입 20년.. 평균근속기간·성별임금격차 여전히 하위권”. 2016-7-10

뉴시스, “'시간제 근로자 36% 최저임금도 못받아'…빈곤·불평등 심화”, 2016-1-1

한겨레, “테마파크로, 키즈카페로…돈으로 사는 ‘가짜 놀이’랍니다”, 201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