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경영 5월호] 가족친화경영 설계 및 운영 방안
가족친화경영 설계 및 운영 방안
WLB연구소 안선영 책임연구원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아무개 선배가 72시간을 쉬지 않고 일해서 계약을 따낸 뒤 장렬히 쓰러졌다거나, 아무개 선배는 일을 하도 해서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전다거나 암에 걸렸다거나 하는 등 참 슬픈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를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 ‘전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일했고 그것이 일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일을 ‘잘하는 것’은 이런 전설들과는 거리가 멀다. 일례로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여성 근로자가 ‘재택근무제’를 활용할 때 조직 내부에서는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집에서 근무하면 일의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집에서 근무하다니 놀고 먹는 것 아닌가, 집에서 애를 보면서 어떻게 일을 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US Offices of Personnel Management의 1998년 자료에 따르면, 기업에서 재택근무제를 도입하는 것이 오히려 근로자 직무성과를 15~20%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려 약 20년 전부터 우리가 흔히 전설이라 일컬었던 일 잘하는 선배들과는 정반대의 연구결과가 존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보다 못한 현실을 살고 있다니, 가히 놀랍지 않은가!
이외에도 시간 유연화(Flexible Work Schedules)가 노동자의 결근율이나 이직 및 조기 퇴직률을 감소시키며 노동자의 일 만족도를 증가시킨다는 다수의 연구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만나본 한 여성 근로자는 ‘유연 근무제를 통해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이 보다 행복해졌고, 이와 같은 제도를 운영하는 회사에 매우 감사하며 더욱 좋은 성과로 보답하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 근로자의 일하는 방식은 어찌 보면 우리가 늘 귀가 닳도록 들어온 ‘전설’들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주는 조직에 대한 충성과 애정, 그리고 일의 성과는 장렬히 전사한 전설 속의 주인공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적어도 과중한 업무로 인해 다리를 전다거나, 암에 걸리는 등 예상치 못한 결과로 본인 삶을 비롯해 회사 업무를 망치는 일은 없을 것이고 오히려, 회사에 애정을 가지고 오랜 기간 근속하면서 자신이 가진 노하우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보다 충실히 근무할 것이다.
이처럼 ‘일을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국사회는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먹고 자고 씻는 기본적인 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일을 잘해야 한다는 목표만 가졌지 ‘어떻게’ 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가야 할 목표만 있고 어떻게 가는 것이 효율적인지를 고민하지 않는 배의 선원들은 금방 지치고 아프고 병이 든다. 지금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선원들은 대부분 아프고 슬프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일하는 것’이 잘하는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2014년 고용노동부는 ‘일家양득’ 캠페인을 필두로 ‘일 생활 균형’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발전시키고 홍보해왔다. ‘일家양득’은 비효율적인 근로 방식과 문화를 개선하고 국민의식을 전환하여, 일과 가정의 균형을 회복하자는 취지의 대국민 캠페인이다. 그동안 정부 차원의 제도적 지원을 통해서 육아 휴직제, 유연 근무제, 시간제 일자리와 같은 다양한 제도들이 공기업과 민간 기업에서 도입할 수 있도록 추동하고 인센티브를 제공해왔던 하향(Top-down)방식과는 달리, 이러한 제도가 조직 속에 잘 정착될 수 있도록 문화적인 인식 제고 및 사회적 동의를 이끌어내 발전적 전략들이 올라올 수 있는 상향(Bottom-up)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실제로 사회적 동의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조직에서 가족친화적인 정책을 도입했다 하더라도 상사나 동료가 이를 이용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다거나, 인사 평가나 승진에 불리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지각한다면 제도의 긍정적인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고용노동부의 ‘2014년 일하는 방식과 문화에 대한 인식조사’에서도 유연 근무제를 도입한 기업의 근로자가 제도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비중이 40%미만인 것으로 나타나 현실과 제도 간의 어긋남(Decoupling)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조직과 사회 내부에서 근로자의 일 생활 균형에 대한 동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업에서 가족친화경영을 선도하고자 하더라도 그 취지와 달리 제도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고 오히려 이를 활용하는 이들을 특정 수혜 집단으로 고립시켜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기업에서 가족친화경영을 설계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직 내부의 합리적인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문제와도 동일하다. 근로자 개개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각각 다르다는 인정과 배려, 이 개인이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며 나 또한 언제든지 이러한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는 신뢰와 믿음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이 운영하는 제도를 구성원 모두가 인지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보다 쉽게 접근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여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제도가 있지만 어디로 신청해야 하는지, 신청에 따른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제도를 사용한 이후 예컨대, 장기간 휴직 이후 복직과 본인의 처우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사례가 있어야만 구성원들이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다.
롯데그룹의 경우 육아 휴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복귀 전 메일링 서비스를 제공하고, 복직 플래너를 통해 복귀 한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하는 과정을 상세히 알려준다. 또한 ‘행복한 워킹맘’이라는 이 러닝 과정을 통해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 부분에 대한 조언들을 제공하여 장기간 휴직 이후에도 마음 편히 직장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먼저 제도를 이용한 사람들이 성공적으로 복귀해 조직에 안착함으로써 다른 근로자들 역시 제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부담 없이 이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육아기가 끝난 직원도 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폭을 넓혀 구성원 간의 형평성 문제를 극복하고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와 더불어 제도를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공백의 대체 인력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조직 내부의 합리적, 윤리적 고민 역시 중요하다. 예컨대, 한 근로자의 육아 휴직으로 인해 공백이 발생하였을 때 그가 담당하던 일이 나머지 구성원들에 쪼개질 경우 추가 근로로 연결되고 휴직을 쓴 사람에 대한 비난과 비판으로 점철될 수 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상시적 휴직을 상쇄할 수 있는 근로 인력을 계획적으로 책정해 순환 구조를 만든다거나, 국가에서 제공하는 육아 휴직 대체인력 지원과 같은 서비스를 활용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성별, 연령, 직급과 관계 없이 모두가 골고루 수혜를 입을 수 있도록 경영 전략을 수립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일 생활 균형’의 목표가 과거 ‘일 가정 양립’ 즉,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기혼 여성노동자의 가사와 노동이라는 이중적 부담을 주로 설명해왔고, 이로 인해 정책 수혜자가 특수한 집단으로 인식되는 부정적 결과들이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과 개인 삶의 질’이라는 차원으로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것이 현재 일 생활 균형이 가지는 큰 의미다. 롯데그룹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근로자도 소외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공유는 매우 중요하다. 실질적으로 과거 육아 휴직과 출산 휴가가 아이를 가진 여성 근로자의 수혜처럼 읽혀졌던 것과는 달리, ‘배우자 출산휴가’, ‘아빠의 달’처럼 아이를 가진 남성 근로자를 위한 제도와 이용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는 이와 같은 맥락으로 ‘맘 편한 일터’의 주요 추진사업으로 ‘직장맘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좋은 아빠 커뮤니티’를 운영하여 남성의 돌봄 참여에 대한 사내 인식제고 및 제도 개선에 이바지하고 있다. ‘나와 자녀의 행복감과 자존감 제고’나 ‘부모와 자녀의 감정 코칭법’과 같은 다양한 강의를 개설해 여성뿐만 아니라 자녀를 둔 남성들이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가족친화경영 설계 및 운영을 위해서는 조직 구성원의 신뢰와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국 사회 분위기에서 반드시 필요한 하나가 더 남아 있다.
바로 근로자의 인식 전환과 함께 최고 경영자와 관리자들의 인식전환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최고 경영자 스스로가 일 생활 균형이 조직에 가져올 변화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관리자 본인이 직접 일 생활 균형의 효과를 경험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일 생활 균형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최고 경영자의 의지가 없이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더라도 최고 경영자의 승인이 없으면 이를 효과적으로 실행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더라도 최고 경영자까지 승인을 받는 절차가 까다롭거나 중간에서 사라지는 등 운영상의 어려움도 제기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 생활 균형 전담팀을 구성하고 자율권을 보장하며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일례로 LG Display의 경우 ‘즐거운 직장팀’을 구성해 단기뿐만 아니라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있고, 이에 대한 자율권을 보장받아 구성원들에게 적절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스타벅스의 경우에도 2016년 기존의 ‘파트너 행복추진파트’를 강화해 ‘파트너 행복추진팀’으로 체제를 전환하며 승인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해당 팀에서 진행되는 사항을 최고 경영자가 바로 받아볼 수 있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마지막으로, 잘 되어 있는 일 생활 균형 프로그램이거나 유명한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무작정 그대로 따라 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라 광야’의 유명한 그림 ‘바그다드 가는 사막 길의 말라 죽은 오렌지 나무’라는 작품이 있다.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에 강제로 이식된 오렌지 나무가 말라 죽은 사진이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조직의 산업적 특성, 지역적 특성 등이 고려되지 않으면 강제로 이식되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기업 구글은 직원들에게 당구대와 수영장, 카페와 뷔페가 마련된 식당을 제공한다. 그러나 지역으로 내려가면 정작 공장의 생산라인 근로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쉬는 시간 동안 편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 소파와 정시 교대, 잔업 없는 삶이다. 지역 내 돌봄 인프라가 부족한 경우 직장 내 어린이집과 같은 시설적인 지원에 대한 목소리가 더 필요할 수 있다. 일괄적으로 특정 요일에 2시간씩 점심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회사가 있지만, 민원인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가 더 많은 지역의 공공기관은 이처럼 모두가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각각의 직종이 가지는 특성과 지역적 격차들이 모두 고려된 새로운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기업의 특징, 내 기업 구성원들의 특징, 그 기업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특징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제 새로운 ‘전설’을 쓸 때이다. 아무개 선배는 모두가 다 쓰는 남성육아 휴직을 쓰지 않고 일만 하는 미련한 사람이고 아무개 선배는 모두가 정시 퇴근을 하는데 미련하게 야근을 해서 조직 문화를 흐리고 생산성을 오히려 떨어트리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새롭게 새하얀 종이를 펼쳐야 한다.